2025. 7. 21. 19:12ㆍ카테고리 없음
50대 후반, 퇴직 후의 일상이 그렇게 고요하게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월급 대신 퇴직금으로 살아가는 삶.
처음에는 두렵기보다는 이상하게 설렜다. 통장에 목돈이 들어온 날, 나는 기분 좋게 집 근처 은행으로 갔다. 직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기예금을 추천했다.
“요즘 3.0% 금리 괜찮습니다. 원금 보장되고, 1년 뒤에 이자까지 받으시면 걱정 없으실 거예요.”
그 말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을 ‘보호’해주는 마지막 장치처럼 느껴졌다.
손실이 두려웠던 나는 그 말에 기대 정기예금에 전액을 맡겼다. 안정성? 충분했다. 하지만…
“왜 내 통장은 점점 말라가는가?”
세 달쯤 지났을까.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지난여름보다 15% 올랐단다.
아내가 자주 가던 슈퍼마켓에서 파는 계란 한 판도 어느새 9천 원이 넘었다.
이율 3.0%? 1년에 고작 몇십만 원 남짓이다. 그것도 세후로 따지면 더 적었다.
매달 생활비가 모자라다 보니 이자를 기다릴 겨를도 없었다. 결국 정기예금을 중도해지해 일부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걸로 가스비와 보험료를 냈다. 통장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야, 너 아직도 정기예금만 하고 있냐?”
그런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대학 시절 친구 준석이였다. 오랜만에 만나자며 약속을 잡았다.
강남 어느 커피숍에서 만난 준석은 보기 좋게 살이 빠져 있었고, 눈빛도 반짝였다.
우리는 옛이야기로 웃고 떠들다가 자연스레 노후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의 한 마디.
“야, 너 아직도 정기예금만 하고 있냐?”
그는 정기예금은 일부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ETF로 운용하고 있었다. 인덱스 ETF, 배당 ETF, 채권 ETF…
처음 듣는 생소한 말이었지만, 그 수익률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올해만 해도 6% 넘게 수익 났어. 인플레이션 감안해도 실질 수익은 훨씬 높지.”
내가 묻는다. “야,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말이야, 지금 같은 저금리 고물가 시대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위험한 거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지킨 건 원금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고집하던 ‘원금 보장’이라는 건 사실, 내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주식도 무섭고, 펀드도 모호하고, ETF는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길만 걸어왔다.
하지만 그 길은 안전하지 않았다. 생활은 점점 빠듯해지고, 내 통장은 마치 지는 달처럼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준석이 말한 한 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돈을 지키려면, 조금은 움직여야 해.”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ETF에 대해 검색을 했다.
인덱스 ETF는 KOSPI200처럼 시장 전체를 따라가는 구조였고, 채권 ETF는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을 준다고 했다. 배당 ETF는 기업의 배당금을 모아 분배해 주는 형태라고 했다.
위험은 있었지만, 공부할수록 ‘관리 가능한 위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4개로 나눠서 투자하고, 수익률이 낮을 땐 재조정하면 된다는 전략도 있었다.
“늦지 않았다. 아직은.”
다음날, 나는 은행 대신 증권사 창구로 갔다. 정기예금 일부를 해지해 CMA 계좌로 옮기고, ETF 계좌를 개설했다.
처음으로 사본 건 'TIGER 미국S&P500 ETF', 그리고 'KODEX 배당성장 ETF', **'TIGER 국채3년 ETF'**였다.
큰돈은 아니지만,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기예금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켜주는 시기는 지나갔다.
2025년, 물가는 오르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퇴직금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운용해야 할 자산이 되었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큰 손실이라는 걸.